앤토니의 오디세이
인도 4대 도시중 남부 최대도시 첸나이(Chennai) 본문
'06년 3월 방문했었던 첸나이...1년이 지나 드디어 포스팅을 한다...
이 지역으로 이동한 이유는 우리회사의 중요한 물류센터 및 남쪽으로 약 3시간정도 이동하여 Pondycherry라는 곳의 작은 창고 점검차 이동하게 되었다.
일부 지도를 보면 아직도 Madras라고 표현되어 있다. 사실 인도에서 90년대 초 대부분의 지명을 다시 바꿨다고 한다. (영국 식민지 지명에서 인도 원래 지명으로...)
인도 수도인 델리에서 비행기로 약 3시간정도 이동했다. 이곳도 뉴델리보다 한참 아래로 내려와서인지 훨씬 더웠다. 뉴델리보다 사람들도 더 어두운 색이였다.
델리에 있을때 호텔에 숙박하지 않고 게시트하우스에 있었다. 아무래도 한국 교민인 사모님께서 밥 직접 해주고 빨래 등도 다 해줘서 편했기도 했고 관리담당이였던 주재원분이 바로 옆에 살았기 때문이였다.
사실 별 기대않고 왔었는데 생각보다 깨끗했다. 지금 기억해봐도 괜찮은 호텔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단, 아침이 영 꽝이였다는...(빵조가리 몇개...)
다음날 점심... 아주 낯선 곳에서 뭘 먹을까 하다가 결국 찾은곳은 중국집...
세계 어디던 먹는게 걱정된다면 중국집에서 볶음밥을 먹으면 괜찮은 선택이지 않을까...
인도의 자동차 시장... 도요타 > 현대차 > 타타(인도차).. 대충 그랬던 것 같다.
도마는 다음과 같은 사연으로 인도에 오게 된다.
이 지역으로 이동한 이유는 우리회사의 중요한 물류센터 및 남쪽으로 약 3시간정도 이동하여 Pondycherry라는 곳의 작은 창고 점검차 이동하게 되었다.
일부 지도를 보면 아직도 Madras라고 표현되어 있다. 사실 인도에서 90년대 초 대부분의 지명을 다시 바꿨다고 한다. (영국 식민지 지명에서 인도 원래 지명으로...)
인도 첸나이...영국식민지때는 마드라스였다.
첸나이 [Chennai/Madras]
인도 타밀나두주(州)의 주도(州都).
위치 인도 타밀나두주
인구 384만 1000명(1991)
벵골만에 면한 항구도시로 남부 인도 최대의 도시이자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이다. 1640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본래 어촌인 이곳에 세인트조지 성채를 구축하고 교역기지로 삼은 것이 시(市)의 시초이다. 성채를 중심으로 해안의 사구(砂丘)를 따라 시가지가 발달하고, 성채 북쪽에 오래 된 상업지구인 조지타운이, 남서쪽에 새로운 상업지구이며 부도심(副都心)인 마운트로드가 형성되었다. 성채에서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뻗은 마리너비치로드는 아름다운 거리로 알려져 있으며, 시민의 산책로이다.
항구는 성채 북쪽에 인공적으로 굴착된 것으로, 1만t급 이상의 선박이 접안 가능한 부두 18개가 있다. 철도는 북부의 센트럴역으로부터 콜카타·델리·뭄바이·방갈로르로 뻗고, 남쪽의 이그모아역으로부터 주내(州內) 및 케랄라주(州)·마이소르주(州) 방면으로 협궤철도(狹軌鐵道)가 뻗어 있다. 국제공항도 있어서, 유럽·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와 항공로가 개설되어 있다. 면직물·기계·차량·정유·고무·비료 등의 공업이 성하며, 피혁·철광석·면직물을 수출한다. 또 영화산업의 도시이고, 마드라스대학교을 비롯하여 공과대학·의과대학 및 미술관·박물관 등이 있다.
*출처 : 네이버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58155
인도 수도인 델리에서 비행기로 약 3시간정도 이동했다. 이곳도 뉴델리보다 한참 아래로 내려와서인지 훨씬 더웠다. 뉴델리보다 사람들도 더 어두운 색이였다.
첸나이
르 메르디앙
델리에 있을때 호텔에 숙박하지 않고 게시트하우스에 있었다. 아무래도 한국 교민인 사모님께서 밥 직접 해주고 빨래 등도 다 해줘서 편했기도 했고 관리담당이였던 주재원분이 바로 옆에 살았기 때문이였다.
사실 별 기대않고 왔었는데 생각보다 깨끗했다. 지금 기억해봐도 괜찮은 호텔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단, 아침이 영 꽝이였다는...(빵조가리 몇개...)
호텔
로비 천장 장식
호텔 로비... 아주 넓고 깨끗하다...
다음날 점심... 아주 낯선 곳에서 뭘 먹을까 하다가 결국 찾은곳은 중국집...
세계 어디던 먹는게 걱정된다면 중국집에서 볶음밥을 먹으면 괜찮은 선택이지 않을까...
디저트로 나오는 박하
크리켓 클럽
인도의 자동차 시장... 도요타 > 현대차 > 타타(인도차).. 대충 그랬던 것 같다.
12제자 중 도마(토마스)가 뭍혀있는 성 토마스 성당
예수 12제자중 무덤이 있는 곳은 단 두곳이라고 한다.
도마는 다음과 같은 사연으로 인도에 오게 된다.
영지주의 문서 중 하나인 도마행전(The Acta Thomae)에는 도마의 선교에 대하여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데 주로 인도에서의 행적이다.
이 책에 의하면 도마는 유대인으로서 인도선교를 요청하는 주님의 부름을 거부하였다. 그런데 주님께서 아반(Abban)이라는 인도의 한 부분을 통치하던 상인에게 나타나 도마를 그의 종으로 팔았다고 한다. 도마는 인도에서 목수로서 일하며 한 궁전을 짓도록 명령 받았다.
그러나 자기 주인이 다른 곳으로 떠나자 궁전을 짓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20개의 은 덩어리를 다 소비해 버리고 말았다.
왕이 돌아왔을 때 그는 도망치려다 붙잡혀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 때 왕의 동생이 죽었는데 그는 하늘에서 도마가 왕을 위해 아주 멋진 궁을 짓는 그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다시 지상에 돌아가도록 허락되어 왕에게 도마가 궁을 짓던 그곳을 사들이도록 권하였다. 왕은 이 제안을 거부했으나 도마를 석방하였고 도마에 의해 회심하였다.
도마의 전도로 말라바(Malabar) 해안선을 따라 기독교인들이 증가했고 그 지역에 일곱 개의 교회를 지었다고 한다. 도마는 72년경 마드라스 근처의 빅 힐(Big Hill)이란 곳에서 창에 맞아 순교하여 밀라포르(Mylapore)라는 곳에 뭍혔다.
인도의 교회들 중에는 도마 교회가 지금도 있다. 인도 특히 케랄라(Kerala)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성 도마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한다.
1522년에 포루투갈인들이 도마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한 무덤을 발견했는데 유해를 밀라포레에 있는 '성 토마스 대성당'에 안치하였다고 전한다.
그의 유해 중 일부는 4세기에 에데사(Edessa)에서도 발견되었고 '도마행전'에 의하면 그 유해를 인도에서 메소포타미아로 옮겼고 아브류찌(Abruzzi)에 있는 오르토나(Ortona)에 최종적으로 안치했다고 한다.
* 참조 : http://blog.naver.com/in30302000?Redirect=Log&logNo=150016641164
지하로 내려가면 이렇게 있지만 실제 저기 아래 무덤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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